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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aimless) walk

  • 2020-10-23
  • Hit : 2749


유독 마음이 오래 머무는 계절이 있다. 나에겐 가을이 그렇다. 좋아하는 계절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때처럼 소박하고 부드럽게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아직 여름의 기억이 미열처럼 남아 있는 무렵,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꺼내든 책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진정한 장소»였다. 이 인터뷰집에서 그녀는 글이 하나의 장소이자 자신의 존재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장소라고 말했다. 그녀만의 간결하고도 명확한 메시지는 무작정 떠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됐다. 글이 좀처럼 써지지 않는 날들 속에서, 진정으로 나를 느낄 수 있는 어떤 장소를 거닐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론가 이동하는 여정만으로도 잠시 일상을 벗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차창이 밀어내는 가을 풍경이 아름다워서인지 되려 내면의 어두운 상념이 두드러졌다. 일상과 단절된다고 느껴지는 순간 밀려오는 작은 불안이 또다시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욕망과 교차했다. 그래서 여행을 함께하는 이에게 나도 모르게 속내를 꺼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자신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공감해 주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었을 테지만, 내밀한 고백이 급작스레 마음을 두드릴 때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특히나 아주 사소한 감정일수록.


오래된 서원이 지켜 온 고즈넉한 마을 외곽에 도착했다. 아무 발자국도 없는 조용한 대지 위로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어 본다. 나는 매일 같이 걸으면서도 단 한 번도 걸음의 의미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학교나 회사를 오가는 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마음이 답답해 공원을 산책하는 일에서도 걸음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경우가 많았다. 낯설고도 광활한 풍경 앞에서 나는 그저 아무 목적 없이 걸어보기로 했다.


걸음은 느림을 담보한다. 그리고 정직하다. 내가 걷는 만큼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내게 다가온다. 천천히 걸으며 내가 풍경을, 풍경이 나를 받아들인다. 그 장면 속에서 나는 점과 같이 작은 존재가 된다. 천변에 켜켜이 쌓인 모래들처럼 잘게 이는 물결이 보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이 실어 온 청명한 새소리가 들린다. 모든 말들이 소거된 고요는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언어들로 가득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아낌없이 주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나는 뜻밖에 마음의 가장자리를 목격하고야 만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상대를 타격했을 어떤 언어와 감정들을 발견하고는 숨을 고르듯 어루만져 본다. 소박할지언정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은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소중히 대하겠다고 다짐한다.


아직 삶을 다하지 않은 내가 감히 걸음을 정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직하게 내디딘 걸음의 총합이 곧 ‘나’임을 믿는다. 거짓없는 계절에 온몸을 맡긴 채 천천히 걸어 보자. 몸을 감싸는 풍경들을 스치어, 사랑하는 계절이 온전히 마음마저 스미도록. 그렇게 가을바람처럼 조금 더 온화하게 삶을 걸어 나갈 방법을 익힌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딛는 어떠한 발걸음도 하찮지 않고 소중하다. 결국 어떠한 미래에 진심으로 마주할 서로에게 도달할 걸음이므로. 걸음은 조금씩 우리 각자의 ‘진정한 장소’에 데려다줄 것이다.


포토그래퍼 | 박유진 eugene bahc
프리랜스 에디터 | 정진욱 jinwook chung
로케이션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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