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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 (tracing) walk

  • 2021-03-31
  • Hit : 1226

클로드 드뷔시가 그러하듯이, 음악은 때때로 내가 목격하지 못한 어떤 풍경을 그려 놓는다. 〈달빛〉으로 유명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을 들을 때면 몽환적인 밤의 장면이 생생히 펼쳐지곤 한다. 한편, 어릴 적 오랫동안 자신이 드뷔시가 환생한 것이라 믿었던 뮤지션은 어떤 신비로운 풍경보다는 조금 더 친숙한 장소를 닮은 소리를 창조한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앨범을 듣노라면 음악이 마치 내가 직접 걸어서 온몸으로 통과할 수 있는 공간적 차원이 되는 이유는 아마도 〈남한산성〉 덕분일 거다.





지금의 팬데믹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몇 년 전이었다. 폭넓고 기다란 음악적 여정을 걸어왔음에도 한국영화에는 닿지 못했던 사카모토 류이치가 드디어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영화음악 작업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극장으로 달려 갔었다. 그렇게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고, 그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은 나에게 있어 특히 애착이 가는 앨범이 되었다. 특히 〈출성〉이라는 곡을 좋아하는데, 영화의 역사적 배경인 병자호란 당시 왕이 끝내 산성을 나서고야 만 처연한 걸음의 무게가 온전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박한 애정으로 조금씩 모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반들은 어느새 나의 작은 컬렉션이 되었다. 글을 쓰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익숙해진 요즘, 나는 과거의 앨범을 꺼내 듣는 것만으로 외로움과 불안을 조금 덜어낸다. 새로운 음악의 생경함 대신 어떤 낯익은 기억을 성실히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남한산성〉을 본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열렸던 사카모토 류이치의 전시를 기억한다. 음악이라는 청각적인 장르를 전시로써 어떻게 눈앞에 펼쳐 보일 수 있을까 라는 호기심은 어쩌면 전시장 입구의 첫 작품에서부터 해소 되었다. 그의 음악이 흘러 나오는 세 개의 스크린에 둘러싸인 채 나는 단지 음악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삶의 순환 같은 것을 보았던 것 같다. 〈LIFE, L I F E〉라는 전시 제목처럼 연속되는 삶의 다양한 장면 중에는 영화 〈남한산성〉도 있었다. 그렇게 같은 음악 위에 또 다른 기억이 포개졌다.





음력으로 절기를 세던 옛사람들은 한 해의 첫 달을 정월이라 불렀다. 새해 처음으로 달이 완전히 차오른 정월 대보름을 지나 봄의 소식을 알리는 경칩을 맞이할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겨울과 봄 사이, 아직 가보지 못한 곳으로부터 음악이 실어 나르는 익숙한 기억에 이끌려 나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남한산성으로 발걸음했다.





완만한 듯 험준한 능선을 따라 오밀조밀 이어진 산성길은 음악이나 영화처럼 처연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맨살을 드러낸 나무와 바위 사이로 뻗은 산성 곁을 따라 사람들은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느덧 나도 그들과 함께 둘레길을 완주하는 것이 이미 정해진 목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산의 높고 낮음을 두 발로 온전히 받아들이며 열심히 땅을 밟았으나 서두르는 마음과는 달리 나의 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김훈 「못다 한 말」 『남한산성』



내게 역사란 늘 어려운 것이었다. 소설에 기대어, 먼저 살다간 이들의 생에 나의 작은 고민을 빗대기는 부끄럽지만 해결되지 않는 딜레마는 여전히 삶의 도처에 있고 나는 언제나 우유부단하다. 지금 내 곁에 없는 사람을 잊기 위해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 사이, 마음은 어떠한 결심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다 끝내 자책에 이른다. 오래된 고민처럼 가파른 산길에서 걸음이 한없이 더디어질 때 나는 옹성 안을 홀로 지키는 나무 앞에 홀린 듯 멈추어 섰다.





마음속 깊은 어떤 기억과 같이 나무는 잘려 나가거나 죽지 않고 기어이 삶을 버텼다. 장면마다 새롭게 교체되는 무대 세트처럼 몇 번이고 계절이 바뀌어도 속지 않은 채, 같은 자세로 이 자리를 지켰을 나무에게서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뒤쳐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두고 지금 주어지는 것들을 온전히 느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존재만으로 웅변하는 듯했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소리 없는 삶의 기록 같은 나뭇가지의 몸짓을 내 식대로 가늠해 본다. 산성의 행궁 안에서 자신의 처신이 가져다 줄 이익만을 따졌던 자들과는 달리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정해진 삶의 목표를 마주했던 나무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운명 같은 땅에 뿌리박아 주어진 것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어느덧 해 질 녘, 지금처럼 손목이나 손바닥 위의 숫자를 보고 셈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봄으로써 시간의 경과를 느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정월부터 차오르고 비워내는 열두 개의 달을 꼬박꼬박 세어가며 시간을 헤아렸을 그들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도 타인으로부터 삶의 오차를 계산하지 않으며, 조바심 없이 순환하는 보름달 같은 희망을 품었으리라. 나를 둘러싼 하늘과 바람 그리고 동고비의 울음소리처럼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미처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어떤 이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으로 바뀌어갔다.





작은 유대감을 끌어 안고 되돌아가는 길 위에서 비로소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음악의 템포나 영화의 시퀀스처럼 정해진 속도를 이따금 놓치거나 쫓기듯 따라갈 때와 달리, 눈앞의 풍경이 온전히 나의 보폭에 따라 현재의 기억에 스미고 있었다. 일상의 장면들은 내가 걷는 걸음과 나란히 눈 앞에 펼쳐진다. 그러하니 시간의 마디마디에 조금 더 여유로이 삶을 기보해 나가도 괜찮다는 듯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이 음악처럼 귓가에 닿을 때 나는 침착히 셔터를 누르며 소중한 순간을 음미하기로 다짐한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과 함께 다시 꺼내 본 전시 티켓은 쉼표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삶을 품고 있었으나 보폭은 서로 달랐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만의 속도로 삶이라는 시퀀스를 살아가도 괜찮다.





기획 | 윤지혜 jihye yoon
사진 | 박유진 eugene bahc
영상 | 정수진 sujin chung, 김재원 jaewon kim
프리랜스 에디터 | 정진욱 jinwook chung
독립매거진 《ESSAI》를 발행.
음악과 함께 삶의 이야기를 기보하듯 글로 기록하는 작가. 『사랑의 에튀드』와 『마음의 평균율』을 썼다.
로케이션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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