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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The Walk #2
The Walk #2 소설가 정지돈, 푹 빠지기 전에 발을 빼서 걷는다

이번 발걸음의 주인은 정지돈 소설가입니다. 2013년 등단한 그는 네 편의 소설집과 세 편의 장편소설을 쌓아오는 한편, 엉뚱한 형태의 글(과 활동)을 엉뚱한 지면(과 지면 아닌 데)에 바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관해 보이는 것들이 회수되어 다시 본인의 책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넓지도 않은 자기 세계에 깊게 빠져들기 전에 다른 곳으로 늦지 않게 발을 빼야 한다고 당부하는 그. 그에게 한눈파는 사이, 우리의 세계도 의외로 깊어집니다.

정지돈 소설가
언제나 신비로운 길

좋은 인터뷰는 지엽적이더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게 좋죠.

글을 통해 걷기란 소재를 많이 언급하셨어요. 요즘은 어딜 걸으세요?
홍제천이요. 특이 생물도 많고, 저는 작년에 알았는데 홍제천에 인공 폭포가 있어요. 홍제천 인공 폭포를 지나 유진상가를 경유해 홍제동으로 올라가면 산으로 둘러싸인 사이로 천이 흐르거든요. 그 길이 언제나 신비로워요.
최근에는 근처에 자주 찾는 카페도 생겼어요. 홍제천 건너, 코페아신드롬이라는 곳이거든요. 외관은 꼭 차이나타운의 한약방 같은데, 드립커피를 정성스레 내려주세요. 맛이 참 좋아요. 저의 산책 코스 초입에 놓인 곳이니 각별하죠.

하루에 몇 보나 걸으세요?
코로나 이후에는 확실히 줄었지만, 일전에 확인했을 때 평균 8000~9000보를 걸었어요. 작년에 3주 정도 뉴욕에 있었는데 그땐 매일 1만 8000보 정도를 걸었고요.

근육통 없으셨어요?
늘 지쳐 잠들기 바빴는데, 걸은 것 때문에 다음 날 앓은 경험은 다행히도 없어요. 걸으면 그날은 피곤해도 다음 날은 멀쩡하더라고요. 원체 많이 걷는 데다 여행 가면 3만 보까지도 걸어요.

걷기 위해서 여행하시는 것 같네요.
진짜예요. 여행 갔을 때 가능하면 그 도시에서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 안 하려고, 최대한 걸어서 움직이려고 신경 써서 동선을 짜요. 저녁쯤 되면 바로 잠들지만, 어차피 가게들도 일찍 문 닫으니까요. 술 좋아하는 친구들과 늦은 밤까지 있으면 조금 힘들긴 하죠.


낯선 곳에서 운전한 경험도 있으세요?
겁나서 잘 못하던 때도 있었는데, 석 달 정도 파리 레지던시에 머물 때 몽생미셸이랑 노르망디 가보려고 차를 렌트했거든요. 파리 시내에서의 운전이 서울에서보다 쉽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걷는 것도 좋지만 한국에선 도시가 자동차 중심으로 짜여 있고 차량이 많아서 스트레스였던 거지 자동차 자체가 싫진 않았던 모양이에요. 차가 오히려 새로운 감각을 제공하는 데다, 애초에 차가 아니면 가기 힘든 곳들도 수두룩하잖아요?

차가 제공하는 새로운 감각 하니까 생각났는데요. 버스 타 있을 때 고개를 창 쪽으로 기울여서 눈코입이 이루는 선이랑 운전 방향이랑 수평으로 만들면, 모든 가게가 평면전개도로 그려질 정도로 선명하게 들어와요. 별것 아니지만 신기해요.
한번 해봐야겠네요!

로버트 벤투리1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가는 도시가 점점 자동차 위주가 되면서 풍경이 마치 디자인과 같은 그래픽이 되었다고, 즉 평면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었죠. 말씀하신 대로 장점도 지니는 것 같아요. 이걸 좋아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좋아하느냐의 문제죠. 작년 초에는 로마에서 투스카니까지 운전해보기도 했는데 그때도 만족스러웠어요.

1Robert Charles Venturi Jr(1925 - 2018). 미국의 건축가로, 파트너인 데니스 스콧 브라운과 함께 건축가 및 도시계획가로 활동했고, 미국의 건축, 건조 환경에 대한 견해를 정립하는 데 힘썼다.



읽은 것과 읽는 것

그동안 자주 좋아하는 텍스트, 영향을 받은 텍스트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1869)을 언급하셨어요.
민희식 선생님이 번역한 오래된 버전으로 읽었는데, ‘시와진실’이란 출판사에서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저도 『감정 교육』을 편집한 적이 있는데, 번역가는 지영화 선생님이셨고요. 개인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타이틀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나 소설 주인공의 원형을 정식으로, 정석으로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아직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엇이든 될 수 있는데, 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렇다 할 게 아닌 채인 주인공 말이죠.
맞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원형을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몇 살 때 처음 읽으셨어요?
20대 중반 돼서야 읽었어요. 『감정 교육』은 청춘 소설이잖아요. 현대적인 성장물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고, 실은 전형적이지 않은 면이 전형이 된 경우죠. 몇백 년이 지났는데도 촌스럽지 않으니 놀라워요. 저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과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1998)을 묶어서 얘기하기를 좋아해요. 두 소설 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젊은 남자 둘이 청춘을 통과하는 과정을 담죠, 그 과정에서는 그들의 예술, 꿈 같은 것들이 부서지고요. 그토록 개인적인 것들을 세계의 상태 속에 녹여낸 작품들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 걸 읽으세요? 이건 북토크, 작가와의 만남의 단골 질문인데, 이런 걸 여쭤본다 한들 동료 작가의 최근작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샤라웃의 형태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쓴 책도 많이 얘기해요. 마침 읽고 있는 책이 가방에 있는데, 『건축과 자유』입니다. 잔카를로 데 카를로라는 이탈리아 건축가의 인터뷰인데, 굉장히 비타협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건축적이고 생활적인 태도를 요약하면 실용적 아나키즘이거든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나키즘이라는 말이랑 실용성이라는 말이 양립할 수가 없어요. 건축가가 아나키스트란 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이 사람이 말하는 아나키즘이 표상하는 바는 이거예요. 목적보다는 수단, 규칙과 질서보다는 자율성이 중요한데, 이를 세계 속에 구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추구해왔어요.

또 막 읽기 시작한 책이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입니다. 글쓴이는 유대인 소설가이고, 이 책은 논픽션이에요. 서문에서 이 사람이 실화를 들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은 소녀 안네의 이야기는 역사에 남는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안네의 집도 명소가 되었잖아요.

영화 <안녕, 헤이즐>(2014)에도 나오면서 인기가 더 높아졌어요.
그랬군요? 그 관광지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이 야물커(유대인 모자)를 쓰고 있었대요. 그 친구에게 상급자가 와서 네가 유대인인 거 티 내면 사람들이 거북해하니까 모자를 숨기라고 언질을 주었다는 거예요. 이상하잖아요, 나치 손에 죽은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장소에서 유대인임을 숨기라는 게. 근데 그런 일은 실제로 자주 일어나요. 살아 있는 유대인을 아직까지도 불편해하는 한편, 죽은 유대인의 이야기에는 감동한다는 모순을 작가는 주목해요.

시트콤 <사인필드> 보셨어요?
그럼요, 다는 못 봤지만요.

1990년대 미국 시트콤 양대산맥이 <프렌즈>(1994~2004)랑 <사인필드>(1989~1998)였는데, 시청자도 두 부류로 나뉘었대요.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를 좋아하는 축과 쪼잔하고 시니컬한 유머를 좋아하는 축으로요. 소위 프렌즈파가 사인필드파를 “너무 유대인이야."라고 했다는 거예요. 실제로도 주연 배우 한 명 빼고는 주요 제작자들까지 유대인이기는 했고.


정지돈 작가가 읽고 있는 책 『건축과 자유』, 이유출판
『야간 경비원의 일기』, 『팬텀 이미지』 등 정지돈 작가의 저서


섞인 사이 이동하기

최근 발표한 산문집에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를 다셨어요. 생각하기 위해 걸으시는 편인가요?
『당당』(『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줄여서 부르고 있습니다.)의 부제는 강윤정 편집자가 지어주셨어요. 사실을 말하자면, 이 산문집의 글들은 걸으며 생각한 것의 모음이 아니에요. 걷고 난 뒤에 생각했죠. 걸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지만, 개중 유의미한 생각은 많지 않아요. 뭔갈 얻고자 걷는다면, 걷기가 재미 없어질 것 같아요.
산책에도 종류가 있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쓴 루소 같은 사람이 걸으면서 내면에 집중하는 산책자라면 발터 벤야민은 걸으면서 밖을 바라보는 사람인데, 저는 후자에 가까워요. 고요한 산길을 걸으며 내면에 침잠하는 것보단, 도시와 자연이 섞인 부분들 사이를 이동하는 게 좋거든요. 움직이면서 외부를 받아들이고 어떤 일들이 있는지 관찰하는 거요. 요즘은 핸드폰으로 촬영하기도 편해서 여러 발견들이 기록되고 공유되죠. 서울도 골목골목, 간판도 재밌고 빌라나 주택을 꾸며놓은 모양새도 각양이에요.

동행도 두시나요?
동료들과 자주 만나서 걸어요. 소설가인 오한기 씨와는 커피를 마시더라도 카페에 앉지 않고 함께 걸어요. 금정연 씨와는 여행에선 자주 걸었는데 서울에선 잘 못 그랬네요.

혼자 걸을 때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어떻게 답변하면 좋을까요. 제가 딱 원하는 질문이라서, 잠시만요. 저는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면 날씨 좋을 땐 테라스에 10분 정도 머물다가 나가서 걸으며 얘기하는 게 가장 좋아요.

어쩐지 유독 우연히 뵀었어요. 테라스에 계셨기 때문이었네요.
테라스에 앉아 있는 걸 진짜 좋아해요. 한국은 날씨나 여러 이유 때문에 테라스가 흔하지는 않지만요. 산책의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바뀌어왔어요. 산책 하면 혼자 조용히 하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리스 시대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면 산책을 ‘소요(逍遙)’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바로 소요 학파죠. 기본 이동수단이 걷기이니 따로 시간을 내 걸을 필요가 없던 시대의 산책은 뭐였을까. 같이 걷는 거였겠죠. 두 사람이 같이 소요하며 대화하는 게 산책의 의미였던 거예요. 지금은 언제나 남들과 연결되어 있는 시대이니, 혼자 있기 위한 산책의 개념이 세진 셈이에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물론 저는 안 끕니다. 접속돼 있는 게 좋아요.

걸으면서 얘기하면 상대와 훨씬 다양한 주제를 나눌 수 있어요. 산만할 순 있지만 이야기가 뻗어나가고 확장되죠.

꿈은 변해요

소설가로서 이전의 걸음은 어떤 게 있으세요?
처음엔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는데요, 꿈이 그렇죠. 변해요. 꿈이 소설가로 바뀌었고, 소설가로서 활동하기 전에는 수많은 아르바이트며 직업을 거쳤거든요. 출판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기도 하고 야간경비원도 하고 서빙은 말할 것도 없었죠.

옷가게에서는 일 안 하셨어요? 직원가로 구입할 수 있잖아요.
안 해봤어요. 30대 중반까지는 옷 살 돈이 없었어요. 옷 산다는 걸 상상도 못 하는 슬픈 20대를 보냈답니다.

의식주라는 단어의 순서처럼, 10, 20대는 ‘의’에 30, 40대는 ‘식’(으로 대표되는 건강에)에, 50, 60대는 ‘주’에 무게를 둔다는 말이 있잖아요.
돈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잖아요, 10, 20대에 ‘주’를 챙길 수 있어야 말이죠. 한 에디터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소위 사람들이 즐기는 산업 발전 단계에서 처음에는 패션이 산업의 핵심이 됐다가 다음엔 요식업이 부흥하다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게 관광 산업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옷에 투자하다가 나중에는 여행에 쓴다는 말이었어요.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생애 주기별로 얘기하는 거라면 비슷한 흐름이네요.
그럴듯해요, 예능도 지금은 패션 관련은 드물잖아요. 패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다 요리 프로그램이 유행했고, 지금은 해외 여행 버라이어티가 많아졌으니.

화난 적이 없습니다

이미 나 있는 길에 반감을 느낀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세요? 이를테면 기성의 소설 같은 것에 대해서요. 이 질문은 모든 인터뷰이에게 공통적으로 묻고 싶고, 개인적으로 가장 큰 관심사인데요. 무엇이든 시작할 때는 반감이 동력이 되기 쉽잖아요. 그런데 하다 보면 분노의 기원을 잃기도 해요. 그때 지속의 동력을 어디서 찾으시는지 궁금해요.
저는 한 번도 화난 적이 없습니다. 반감이라는 게 좀 메타적일 순 있겠는데요. 제가 전형적인 작품을 덜 재밌어하고 안 좋아하는 것은 있지만 싫어하진 않아요. 오락영화 좋아하고 장르문학 좋아해요. 다만 제가 쓰는 거, 진짜로 좋아하는 것들이 그것들이 아닐 뿐이죠. 반감을 이야기한 맥락은, 저는 제 작품이 유별나다고 여긴 적이 없어요. 예술사를 살피면 모든 장르에 별별 이상한 작품이 많죠. 저는 그저 좋은 작업이 됐으면 하는데, 그것을 평가하면서 하라는 대로 안 하고 다르게 하냐고 화를 내는 이들을 마주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화가 나더라고요. 대체 뭐지,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싶죠.

사회도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이를테면 소수자, 비혼주의자에게 결혼, 출산을 강요하죠. 소위 어른들, 주류 사회의 일원들이 자꾸 압박해 와요. 그래, 사회에서 그러는 거야 그렇다 쳐요. 그치만 예술이야말로 열려 있어야 되는 곳이잖아요. 예술에서 주류의 형식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기이해요. “네가 하는 거, 다 예전에 했던 거야.” 하는 식의 비난도 있어요. 그것도 참 말이 안 돼요. 주류적인 건 해도 되고 비주류적인 거는 했던 거면 그만하라니. 형편없는 비판이 줄곧 반복되니까 놀라고 화가 나는 거죠.

화가 여전하신데요?
그러네요. 여전하네요.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태도를 이어가고, 생활 속에도 그런 것들이 스며드는 것 같거든요. 비단 예술만 아니라 생활 깊숙이요.

포스트모더니즘, 하이퍼텍스트 같은 수식이 꾸준히 달리셨던 건 인용이 뒷받침이 아니라 주인이 되기 때문일까요.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텍스트는 다 읽는 편이신가요? 이걸 궁금해하는 친구가 의외로 많더라고요.
물론 전문을 읽지 않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발췌독을 하는 요령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요령이라기보단 지녀야 할 마음을 알려드릴게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 완독을 못 하거나 안 했을 때, 즉 건너뛰며 읽었을 때 읽었다고 말해도 될지 많이들 고민하잖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과감히 읽고 싶은 대로 읽고도 이 책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죠. 한 챕터만 읽고도 그 챕터가 좋으면 더 안 읽어도 돼요. 그 책에 인연이 있고, 그 책에 있는 나머지 부분이 좋다면, 그리고 내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그 부분들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다 읽어야 된다면서 억지로 읽다가 싫어지고 기억에서도 지우는 건 최악이에요. 나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읽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놓치지 마세요. 다 읽었다고 생각하니까 다시 안 보게 되는 거거든요.

개인의 독서에는 흐름이 있어요. 책에 푹 빠지는 시기에는 누가 안 시켜도 참아가며 완독하는데 한번 그 시기를 통과하면 이후부터는 마음을 열어놓고 발췌독을 편하게 하게 되죠.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쪽으로

평소에 쓰는 시간과 쓰지 않는 시간을 구분해두시나요? 학생처럼 학기중과 방학이 있다든지요.
최근 몇 년간은 쓰지 않는 시기가 없었어요.

데뷔 초반에는 과작인 편이었잖아요. 최근 몇 년간은 왕성한 다작의 시기었고요.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하는 데까지 해보자라는 쪽으로요. 느슨한 패턴을 찾자면, 잠에서 깬 오후 1, 2시에 간단히 씻고 두세 시간 써요. 저녁이랑 밤 시간에는 이것저것 하다가 자정부터 새벽까지 작업해요. 그런데 점점 이 패턴도 부담이 돼요. 그래서 조금은 걱정이에요. 한계가 오는 느낌이라서요.

풀업하세요? 맨몸운동이라도 하면 체력이 좀 올라올걸요.
집에 설치는 안 했지만 아파트 단지에 있는 철봉에서 가끔 해요. 그래도 다섯 개 정도 되더라고요.

그 풍경 약간 <엑시트>(2019) 조정석 같을 수도 있겠는데요, 다른 주민들 눈에 안 띌까요.
새벽 3시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해야죠, 철봉은.

본인이 쓴 글의 첫 독자가 되시잖아요. 자주 들춰보기도 하나요?
제가 쓴 걸 다시 읽는 법은 별로 없어요. 북토크나 인터뷰가 있어서 읽어야 될 때 말고는 책장을 열지 않아요.

다시 읽고 거슬리는 데를 수정해서 개정판을 내는 작가들도 적지 않잖아요. 그러고 싶은 마음 안 드세요?
최인훈 소설가의 『광장』(초판 1960, 최근 개정판 2015)이 진짜 유명한 사례인데, 그렇게 될까 봐 못 읽겠어요. 보면 분명 고치고 싶을 텐데 고치는 게 옳은 일인가 생각해요. 물론 지금의 내가 봤을 때는 고쳐야겠죠. 하지만 그 소설을 썼을 때의 나는 옳다고 판단했잖아요. 물론 시간이 없었을 때 대충 썼을 수도 있지만, 그 채로 독자들에게 갔다면 고치기보다는 새로 다른 것을 쓰는 게 더 맞다고 느껴요.

수업할 때나 글 같이 쓰는 친구들에게 당부하는 것이 있는데요. 이를테면 하나의 소설을 써놓고 그 소설을 몇 년 동안, 때로는 해가 두 자릿수가 넘도록 계속 고치고 있는 친구들이 있죠. 자기가 쓴 소설을, 심지어 발표도 하지 않은 것을 계속 만져나가요. 첫 예술 작업이고 거기에 모든 게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미련을 버릴 수 없는 거죠.

계속 갱신되고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작품이라니, 자아네요.
그런데 그런 동일시는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거든요.

심지어 망할 수도 없겠네요.
그렇죠. 망할 수도 없으니까, 어떻게 되냐면 그러니까 그냥 이제 작가가 아니고 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장인정신에 바탕한 숭고한 작업이고, 하나의 작업에 평생 천착하는 예술가라는 환상이 분명히 존재하고요. 그런데 그 전형적인 폐쇄의 고리에 빠지지 않고 빠르게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못한 것은 그다음에 할 수 있어요. 넓지도 않은 자기 세계에 깊게 빠져들기 전에 다른 곳으로 늦지 않게 발을 빼야 해요. 그러는 데서 오히려 깊이가 찾아져요. 넓어지면 더 깊어져요.

발을 뺀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발을 빼야 디딜 수 있어지니까요.

갈등이 목적

소설 쓰기의 목적이 독자와 작가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밝히신 적 있어요.
나보코프의 인용이었어요, 진지한 소설은 인물과 인물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이요. 현대예술에서는 자연스러운 태도예요. 모든 현대예술의 수많은 장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독해에, 쉽게 말하면 반기를 들어요. 하지만 때로 현대의 독자들이 그런 소설에 불쾌감을 표현하거나 화를 낸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워요. 책 읽는 사람들은 소수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회문제에도 밝고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이라고 믿는데, 작은 것만 달라져도 화를 내는 모습을 맞닥뜨릴 때 말이에요. 읽는 사람에게 제동을 건다는 오래된 방식이 오히려 드물어진 걸까요. 요즘은 모든 콘텐츠가 소비자 중심이기에 ‘니즈’를 충족해야 한다는 기대가 있어서인지.

그런 면에서 작가님이 성취한 바를 실감해요. 작가님의 책들은 적어도 시각적인 면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보여요.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스페이스 (논)픽션』 같은 책들 보면요.
둘 다 디자인이 좋죠. 예전에 제가 출판사에서 일할 때 들은 충격적인 말 하나가 그거였어요. 제가 디자인을 이렇게이렇게 해보는 거 어떨까 제안하니까 선배 마케터가 “지돈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한국 독자들은 세련된 거 싫어해. 우리가 세련된 거 못해서 안 하는 줄 알아?” 묻더라고요. 세련됐다라는 판단에도 층위가 다양하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세련됨’에는 재수 없다는 인식도 붙어요. 수더분하고 소탈한 것의 반대랄까.

수더분보다는 건조한 걸 못 참는 것일 수도 있어요.
건조한 것도 못 참죠. 세련된 게 대체로 건조한 거랑 같이 가잖아요.

저나 제 친구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브랜드에서 만약 그런 컴플레인(배려 없는 디자인이다, 읽기 불편하다 등의)을 받았다고 하면요, 그건 좋은 시그널이에요. 우리의 작고 소중한 우물을 넘어섰다는 뜻이니까요. 나 혹은 내가 만든 책으로써 전혀 호감을 주지 못할 사람과 마주쳤다는 건, 지금 우리의 세계가 넓어졌다는 뜻이니까요.
계속 넓어져야 될 텐데요. 쪽프레스에서 나온 책의 고정 독자가 한국에 1만 명 단위만 돼도!

뭘 하든 1000명만 돼도요!
안드레스 솔라노 작가의 책도 좋던데요. 디자인도 좋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맞아요. “살라리오 미니모(최저 임금)”이라는 제목에 어울릴 만큼 가볍고 홀가분하게 작업했거든요. 몇 배수 시안 같은 불필요한 절차도 없었고.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니

소설가가 아니라면 어떤 길을 걷고 싶으세요?
소설가 외에는 없습니다. 병행할 수 있는 거라면, 최근에 친구랑 얘기하면서 돈이 많아지면 뭐 하고 싶냐는 얘기를 잠깐 나눴는데 갑자기 떠오른 게 목욕탕이었어요. 언젠가 도쿄에 갔을 때 그냥 동네 목욕탕 같은 델 들어간 적 있거든요. 깨끗하고 잘 정리된 예쁜 타일이 있는 동네 목욕탕을 운영해보는 것도 상상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소설가라는 직업에 만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립적인 작업을 하고 시간을 비롯한 생활의 모든 것을 간섭받지 않고 제가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영화 <타르>(2022)에서 타르(케이트 블란쳇)가 시간을 통제하는 위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기억나는데요.
타르는 남을 통제하지만, 저는 저만 통제하죠! 출퇴근 안 해도 되는 것만도 너무 좋아요.

일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9 to 6가 싫은 거죠?
9 to 6가 싫어요. 정해놓은 시간을 정해놓은 공간에서 일해야 된다는 게 안 맞거든요. 학교 다닐 때도 버거웠고.

그것만 아니면 일은 하실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정작 해내는 일의 양이 적지 않죠. 혼자 작업하는 것의 외로움은요?
이런 말 하면 웃긴데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외동으로 자랐거든요. 혼자 있는 게 당연해서 혼자서도 할 것이 많고 외롭다는 감각을 못 느끼겠어요.

독립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통제해나간다는 건, 울타리가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런 의미의 결핍은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그건 그런 거죠. 두려움. 혼자서 해야 되고 보장해주는 뭔가가 없다는 두려움. 그것은 예전에도 겪었고 지금도 때때로 마주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동료 작가의 존재예요. 외로움이든 두려움이든 뭐든 극복하게 돼요. 이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같이하지 않더라도 나와 소통이 되고 내 작업을 지지해주는 동료가 존재하면요. 다 같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도 자주 동료를 강조하곤 했어요.

근데 그게 가장 그들이 채우기 힘든 요소잖아요.
학교 다닐 때 잘 만나야죠. 학교 다닐 때 딱 보고 쟤는 진짜다 이렇게요. 더불어 그렇게 같이 잘 지내려면 자기도 찐이어야죠. 특별한 게 아니라 자기 작업 열심히 하고 진짜로 좋아하면 되는 거니까요. 저는 운이 좋기도 했지만, 이렇게 생각해요. 본인이 성실하게 자기 작업을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동료는 나타나게 돼 있다고. 믿고 그냥 하면 된다고. 그러니까 친구를 찾아야 된다면서 네트워킹을 한다고 어디를 가고 그럴 필요 없어요.

인터뷰이 | 정지돈 jidon jung
인터뷰어 | 김미래 mirae kim
편집 | 쪽프레스 press jjokk
기획 | 윤지혜 jihye yoon
사진 | 박유진 eugene park
디자인 | 신채린 chaerin shin 공간 | 스파인서울 spineseoul


2023.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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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명 소설가 정지돈, 푹 빠지기 전에 발을 빼서 걷는다
판매가 ₩1
상품간략설명 인터뷰이 | 정지돈 jidon jung
인터뷰어 | 김미래 mirae kim
편집 | 쪽프레스 press jjokk
기획 | 윤지혜 jihye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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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 신채린 chaerin shin 공간 | 스파인서울 spine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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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지돈, 푹 빠지기 전에 발을 빼서 걷는다 수량증가 수량감소 1 (  )
인터뷰이 | 정지돈 jidon jung
인터뷰어 | 김미래 mirae kim
편집 | 쪽프레스 press jjokk
기획 | 윤지혜 jihye yoon
사진 | 박유진 eugen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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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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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지돈, 푹 빠지기 전에 발을 빼서 걷는다

판매가

₩1

상품간략설명

인터뷰이 | 정지돈 jidon jung
인터뷰어 | 김미래 mirae kim
편집 | 쪽프레스 press jjokk
기획 | 윤지혜 jihye yoon
사진 | 박유진 eugene park
디자인 | 신채린 chaerin shin 공간 | 스파인서울 spineseoul


2023.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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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목차
The Walk #2
The Walk #2 소설가 정지돈, 푹 빠지기 전에 발을 빼서 걷는다

이번 발걸음의 주인은 정지돈 소설가입니다. 2013년 등단한 그는 네 편의 소설집과 세 편의 장편소설을 쌓아오는 한편, 엉뚱한 형태의 글(과 활동)을 엉뚱한 지면(과 지면 아닌 데)에 바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관해 보이는 것들이 회수되어 다시 본인의 책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넓지도 않은 자기 세계에 깊게 빠져들기 전에 다른 곳으로 늦지 않게 발을 빼야 한다고 당부하는 그. 그에게 한눈파는 사이, 우리의 세계도 의외로 깊어집니다.

정지돈 소설가
언제나 신비로운 길

좋은 인터뷰는 지엽적이더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게 좋죠.

글을 통해 걷기란 소재를 많이 언급하셨어요. 요즘은 어딜 걸으세요?
홍제천이요. 특이 생물도 많고, 저는 작년에 알았는데 홍제천에 인공 폭포가 있어요. 홍제천 인공 폭포를 지나 유진상가를 경유해 홍제동으로 올라가면 산으로 둘러싸인 사이로 천이 흐르거든요. 그 길이 언제나 신비로워요.
최근에는 근처에 자주 찾는 카페도 생겼어요. 홍제천 건너, 코페아신드롬이라는 곳이거든요. 외관은 꼭 차이나타운의 한약방 같은데, 드립커피를 정성스레 내려주세요. 맛이 참 좋아요. 저의 산책 코스 초입에 놓인 곳이니 각별하죠.

하루에 몇 보나 걸으세요?
코로나 이후에는 확실히 줄었지만, 일전에 확인했을 때 평균 8000~9000보를 걸었어요. 작년에 3주 정도 뉴욕에 있었는데 그땐 매일 1만 8000보 정도를 걸었고요.

근육통 없으셨어요?
늘 지쳐 잠들기 바빴는데, 걸은 것 때문에 다음 날 앓은 경험은 다행히도 없어요. 걸으면 그날은 피곤해도 다음 날은 멀쩡하더라고요. 원체 많이 걷는 데다 여행 가면 3만 보까지도 걸어요.

걷기 위해서 여행하시는 것 같네요.
진짜예요. 여행 갔을 때 가능하면 그 도시에서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 안 하려고, 최대한 걸어서 움직이려고 신경 써서 동선을 짜요. 저녁쯤 되면 바로 잠들지만, 어차피 가게들도 일찍 문 닫으니까요. 술 좋아하는 친구들과 늦은 밤까지 있으면 조금 힘들긴 하죠.


낯선 곳에서 운전한 경험도 있으세요?
겁나서 잘 못하던 때도 있었는데, 석 달 정도 파리 레지던시에 머물 때 몽생미셸이랑 노르망디 가보려고 차를 렌트했거든요. 파리 시내에서의 운전이 서울에서보다 쉽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걷는 것도 좋지만 한국에선 도시가 자동차 중심으로 짜여 있고 차량이 많아서 스트레스였던 거지 자동차 자체가 싫진 않았던 모양이에요. 차가 오히려 새로운 감각을 제공하는 데다, 애초에 차가 아니면 가기 힘든 곳들도 수두룩하잖아요?

차가 제공하는 새로운 감각 하니까 생각났는데요. 버스 타 있을 때 고개를 창 쪽으로 기울여서 눈코입이 이루는 선이랑 운전 방향이랑 수평으로 만들면, 모든 가게가 평면전개도로 그려질 정도로 선명하게 들어와요. 별것 아니지만 신기해요.
한번 해봐야겠네요!

로버트 벤투리1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가는 도시가 점점 자동차 위주가 되면서 풍경이 마치 디자인과 같은 그래픽이 되었다고, 즉 평면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었죠. 말씀하신 대로 장점도 지니는 것 같아요. 이걸 좋아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좋아하느냐의 문제죠. 작년 초에는 로마에서 투스카니까지 운전해보기도 했는데 그때도 만족스러웠어요.

1Robert Charles Venturi Jr(1925 - 2018). 미국의 건축가로, 파트너인 데니스 스콧 브라운과 함께 건축가 및 도시계획가로 활동했고, 미국의 건축, 건조 환경에 대한 견해를 정립하는 데 힘썼다.



읽은 것과 읽는 것

그동안 자주 좋아하는 텍스트, 영향을 받은 텍스트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1869)을 언급하셨어요.
민희식 선생님이 번역한 오래된 버전으로 읽었는데, ‘시와진실’이란 출판사에서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저도 『감정 교육』을 편집한 적이 있는데, 번역가는 지영화 선생님이셨고요. 개인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타이틀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나 소설 주인공의 원형을 정식으로, 정석으로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아직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엇이든 될 수 있는데, 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렇다 할 게 아닌 채인 주인공 말이죠.
맞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원형을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몇 살 때 처음 읽으셨어요?
20대 중반 돼서야 읽었어요. 『감정 교육』은 청춘 소설이잖아요. 현대적인 성장물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고, 실은 전형적이지 않은 면이 전형이 된 경우죠. 몇백 년이 지났는데도 촌스럽지 않으니 놀라워요. 저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과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1998)을 묶어서 얘기하기를 좋아해요. 두 소설 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젊은 남자 둘이 청춘을 통과하는 과정을 담죠, 그 과정에서는 그들의 예술, 꿈 같은 것들이 부서지고요. 그토록 개인적인 것들을 세계의 상태 속에 녹여낸 작품들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 걸 읽으세요? 이건 북토크, 작가와의 만남의 단골 질문인데, 이런 걸 여쭤본다 한들 동료 작가의 최근작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샤라웃의 형태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쓴 책도 많이 얘기해요. 마침 읽고 있는 책이 가방에 있는데, 『건축과 자유』입니다. 잔카를로 데 카를로라는 이탈리아 건축가의 인터뷰인데, 굉장히 비타협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건축적이고 생활적인 태도를 요약하면 실용적 아나키즘이거든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나키즘이라는 말이랑 실용성이라는 말이 양립할 수가 없어요. 건축가가 아나키스트란 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이 사람이 말하는 아나키즘이 표상하는 바는 이거예요. 목적보다는 수단, 규칙과 질서보다는 자율성이 중요한데, 이를 세계 속에 구현해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추구해왔어요.

또 막 읽기 시작한 책이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입니다. 글쓴이는 유대인 소설가이고, 이 책은 논픽션이에요. 서문에서 이 사람이 실화를 들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은 소녀 안네의 이야기는 역사에 남는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안네의 집도 명소가 되었잖아요.

영화 <안녕, 헤이즐>(2014)에도 나오면서 인기가 더 높아졌어요.
그랬군요? 그 관광지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이 야물커(유대인 모자)를 쓰고 있었대요. 그 친구에게 상급자가 와서 네가 유대인인 거 티 내면 사람들이 거북해하니까 모자를 숨기라고 언질을 주었다는 거예요. 이상하잖아요, 나치 손에 죽은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장소에서 유대인임을 숨기라는 게. 근데 그런 일은 실제로 자주 일어나요. 살아 있는 유대인을 아직까지도 불편해하는 한편, 죽은 유대인의 이야기에는 감동한다는 모순을 작가는 주목해요.

시트콤 <사인필드> 보셨어요?
그럼요, 다는 못 봤지만요.

1990년대 미국 시트콤 양대산맥이 <프렌즈>(1994~2004)랑 <사인필드>(1989~1998)였는데, 시청자도 두 부류로 나뉘었대요.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를 좋아하는 축과 쪼잔하고 시니컬한 유머를 좋아하는 축으로요. 소위 프렌즈파가 사인필드파를 “너무 유대인이야."라고 했다는 거예요. 실제로도 주연 배우 한 명 빼고는 주요 제작자들까지 유대인이기는 했고.


정지돈 작가가 읽고 있는 책 『건축과 자유』, 이유출판
『야간 경비원의 일기』, 『팬텀 이미지』 등 정지돈 작가의 저서


섞인 사이 이동하기

최근 발표한 산문집에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를 다셨어요. 생각하기 위해 걸으시는 편인가요?
『당당』(『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줄여서 부르고 있습니다.)의 부제는 강윤정 편집자가 지어주셨어요. 사실을 말하자면, 이 산문집의 글들은 걸으며 생각한 것의 모음이 아니에요. 걷고 난 뒤에 생각했죠. 걸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지만, 개중 유의미한 생각은 많지 않아요. 뭔갈 얻고자 걷는다면, 걷기가 재미 없어질 것 같아요.
산책에도 종류가 있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쓴 루소 같은 사람이 걸으면서 내면에 집중하는 산책자라면 발터 벤야민은 걸으면서 밖을 바라보는 사람인데, 저는 후자에 가까워요. 고요한 산길을 걸으며 내면에 침잠하는 것보단, 도시와 자연이 섞인 부분들 사이를 이동하는 게 좋거든요. 움직이면서 외부를 받아들이고 어떤 일들이 있는지 관찰하는 거요. 요즘은 핸드폰으로 촬영하기도 편해서 여러 발견들이 기록되고 공유되죠. 서울도 골목골목, 간판도 재밌고 빌라나 주택을 꾸며놓은 모양새도 각양이에요.

동행도 두시나요?
동료들과 자주 만나서 걸어요. 소설가인 오한기 씨와는 커피를 마시더라도 카페에 앉지 않고 함께 걸어요. 금정연 씨와는 여행에선 자주 걸었는데 서울에선 잘 못 그랬네요.

혼자 걸을 때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어떻게 답변하면 좋을까요. 제가 딱 원하는 질문이라서, 잠시만요. 저는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면 날씨 좋을 땐 테라스에 10분 정도 머물다가 나가서 걸으며 얘기하는 게 가장 좋아요.

어쩐지 유독 우연히 뵀었어요. 테라스에 계셨기 때문이었네요.
테라스에 앉아 있는 걸 진짜 좋아해요. 한국은 날씨나 여러 이유 때문에 테라스가 흔하지는 않지만요. 산책의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바뀌어왔어요. 산책 하면 혼자 조용히 하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리스 시대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면 산책을 ‘소요(逍遙)’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바로 소요 학파죠. 기본 이동수단이 걷기이니 따로 시간을 내 걸을 필요가 없던 시대의 산책은 뭐였을까. 같이 걷는 거였겠죠. 두 사람이 같이 소요하며 대화하는 게 산책의 의미였던 거예요. 지금은 언제나 남들과 연결되어 있는 시대이니, 혼자 있기 위한 산책의 개념이 세진 셈이에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물론 저는 안 끕니다. 접속돼 있는 게 좋아요.

걸으면서 얘기하면 상대와 훨씬 다양한 주제를 나눌 수 있어요. 산만할 순 있지만 이야기가 뻗어나가고 확장되죠.

꿈은 변해요

소설가로서 이전의 걸음은 어떤 게 있으세요?
처음엔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는데요, 꿈이 그렇죠. 변해요. 꿈이 소설가로 바뀌었고, 소설가로서 활동하기 전에는 수많은 아르바이트며 직업을 거쳤거든요. 출판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기도 하고 야간경비원도 하고 서빙은 말할 것도 없었죠.

옷가게에서는 일 안 하셨어요? 직원가로 구입할 수 있잖아요.
안 해봤어요. 30대 중반까지는 옷 살 돈이 없었어요. 옷 산다는 걸 상상도 못 하는 슬픈 20대를 보냈답니다.

의식주라는 단어의 순서처럼, 10, 20대는 ‘의’에 30, 40대는 ‘식’(으로 대표되는 건강에)에, 50, 60대는 ‘주’에 무게를 둔다는 말이 있잖아요.
돈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잖아요, 10, 20대에 ‘주’를 챙길 수 있어야 말이죠. 한 에디터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소위 사람들이 즐기는 산업 발전 단계에서 처음에는 패션이 산업의 핵심이 됐다가 다음엔 요식업이 부흥하다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게 관광 산업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옷에 투자하다가 나중에는 여행에 쓴다는 말이었어요.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생애 주기별로 얘기하는 거라면 비슷한 흐름이네요.
그럴듯해요, 예능도 지금은 패션 관련은 드물잖아요. 패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다 요리 프로그램이 유행했고, 지금은 해외 여행 버라이어티가 많아졌으니.

화난 적이 없습니다

이미 나 있는 길에 반감을 느낀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세요? 이를테면 기성의 소설 같은 것에 대해서요. 이 질문은 모든 인터뷰이에게 공통적으로 묻고 싶고, 개인적으로 가장 큰 관심사인데요. 무엇이든 시작할 때는 반감이 동력이 되기 쉽잖아요. 그런데 하다 보면 분노의 기원을 잃기도 해요. 그때 지속의 동력을 어디서 찾으시는지 궁금해요.
저는 한 번도 화난 적이 없습니다. 반감이라는 게 좀 메타적일 순 있겠는데요. 제가 전형적인 작품을 덜 재밌어하고 안 좋아하는 것은 있지만 싫어하진 않아요. 오락영화 좋아하고 장르문학 좋아해요. 다만 제가 쓰는 거, 진짜로 좋아하는 것들이 그것들이 아닐 뿐이죠. 반감을 이야기한 맥락은, 저는 제 작품이 유별나다고 여긴 적이 없어요. 예술사를 살피면 모든 장르에 별별 이상한 작품이 많죠. 저는 그저 좋은 작업이 됐으면 하는데, 그것을 평가하면서 하라는 대로 안 하고 다르게 하냐고 화를 내는 이들을 마주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화가 나더라고요. 대체 뭐지,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싶죠.

사회도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이를테면 소수자, 비혼주의자에게 결혼, 출산을 강요하죠. 소위 어른들, 주류 사회의 일원들이 자꾸 압박해 와요. 그래, 사회에서 그러는 거야 그렇다 쳐요. 그치만 예술이야말로 열려 있어야 되는 곳이잖아요. 예술에서 주류의 형식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기이해요. “네가 하는 거, 다 예전에 했던 거야.” 하는 식의 비난도 있어요. 그것도 참 말이 안 돼요. 주류적인 건 해도 되고 비주류적인 거는 했던 거면 그만하라니. 형편없는 비판이 줄곧 반복되니까 놀라고 화가 나는 거죠.

화가 여전하신데요?
그러네요. 여전하네요.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태도를 이어가고, 생활 속에도 그런 것들이 스며드는 것 같거든요. 비단 예술만 아니라 생활 깊숙이요.

포스트모더니즘, 하이퍼텍스트 같은 수식이 꾸준히 달리셨던 건 인용이 뒷받침이 아니라 주인이 되기 때문일까요.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텍스트는 다 읽는 편이신가요? 이걸 궁금해하는 친구가 의외로 많더라고요.
물론 전문을 읽지 않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발췌독을 하는 요령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요령이라기보단 지녀야 할 마음을 알려드릴게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 완독을 못 하거나 안 했을 때, 즉 건너뛰며 읽었을 때 읽었다고 말해도 될지 많이들 고민하잖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과감히 읽고 싶은 대로 읽고도 이 책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죠. 한 챕터만 읽고도 그 챕터가 좋으면 더 안 읽어도 돼요. 그 책에 인연이 있고, 그 책에 있는 나머지 부분이 좋다면, 그리고 내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그 부분들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다 읽어야 된다면서 억지로 읽다가 싫어지고 기억에서도 지우는 건 최악이에요. 나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읽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놓치지 마세요. 다 읽었다고 생각하니까 다시 안 보게 되는 거거든요.

개인의 독서에는 흐름이 있어요. 책에 푹 빠지는 시기에는 누가 안 시켜도 참아가며 완독하는데 한번 그 시기를 통과하면 이후부터는 마음을 열어놓고 발췌독을 편하게 하게 되죠.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쪽으로

평소에 쓰는 시간과 쓰지 않는 시간을 구분해두시나요? 학생처럼 학기중과 방학이 있다든지요.
최근 몇 년간은 쓰지 않는 시기가 없었어요.

데뷔 초반에는 과작인 편이었잖아요. 최근 몇 년간은 왕성한 다작의 시기었고요.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하는 데까지 해보자라는 쪽으로요. 느슨한 패턴을 찾자면, 잠에서 깬 오후 1, 2시에 간단히 씻고 두세 시간 써요. 저녁이랑 밤 시간에는 이것저것 하다가 자정부터 새벽까지 작업해요. 그런데 점점 이 패턴도 부담이 돼요. 그래서 조금은 걱정이에요. 한계가 오는 느낌이라서요.

풀업하세요? 맨몸운동이라도 하면 체력이 좀 올라올걸요.
집에 설치는 안 했지만 아파트 단지에 있는 철봉에서 가끔 해요. 그래도 다섯 개 정도 되더라고요.

그 풍경 약간 <엑시트>(2019) 조정석 같을 수도 있겠는데요, 다른 주민들 눈에 안 띌까요.
새벽 3시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해야죠, 철봉은.

본인이 쓴 글의 첫 독자가 되시잖아요. 자주 들춰보기도 하나요?
제가 쓴 걸 다시 읽는 법은 별로 없어요. 북토크나 인터뷰가 있어서 읽어야 될 때 말고는 책장을 열지 않아요.

다시 읽고 거슬리는 데를 수정해서 개정판을 내는 작가들도 적지 않잖아요. 그러고 싶은 마음 안 드세요?
최인훈 소설가의 『광장』(초판 1960, 최근 개정판 2015)이 진짜 유명한 사례인데, 그렇게 될까 봐 못 읽겠어요. 보면 분명 고치고 싶을 텐데 고치는 게 옳은 일인가 생각해요. 물론 지금의 내가 봤을 때는 고쳐야겠죠. 하지만 그 소설을 썼을 때의 나는 옳다고 판단했잖아요. 물론 시간이 없었을 때 대충 썼을 수도 있지만, 그 채로 독자들에게 갔다면 고치기보다는 새로 다른 것을 쓰는 게 더 맞다고 느껴요.

수업할 때나 글 같이 쓰는 친구들에게 당부하는 것이 있는데요. 이를테면 하나의 소설을 써놓고 그 소설을 몇 년 동안, 때로는 해가 두 자릿수가 넘도록 계속 고치고 있는 친구들이 있죠. 자기가 쓴 소설을, 심지어 발표도 하지 않은 것을 계속 만져나가요. 첫 예술 작업이고 거기에 모든 게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미련을 버릴 수 없는 거죠.

계속 갱신되고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작품이라니, 자아네요.
그런데 그런 동일시는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거든요.

심지어 망할 수도 없겠네요.
그렇죠. 망할 수도 없으니까, 어떻게 되냐면 그러니까 그냥 이제 작가가 아니고 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장인정신에 바탕한 숭고한 작업이고, 하나의 작업에 평생 천착하는 예술가라는 환상이 분명히 존재하고요. 그런데 그 전형적인 폐쇄의 고리에 빠지지 않고 빠르게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못한 것은 그다음에 할 수 있어요. 넓지도 않은 자기 세계에 깊게 빠져들기 전에 다른 곳으로 늦지 않게 발을 빼야 해요. 그러는 데서 오히려 깊이가 찾아져요. 넓어지면 더 깊어져요.

발을 뺀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발을 빼야 디딜 수 있어지니까요.

갈등이 목적

소설 쓰기의 목적이 독자와 작가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밝히신 적 있어요.
나보코프의 인용이었어요, 진지한 소설은 인물과 인물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이요. 현대예술에서는 자연스러운 태도예요. 모든 현대예술의 수많은 장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독해에, 쉽게 말하면 반기를 들어요. 하지만 때로 현대의 독자들이 그런 소설에 불쾌감을 표현하거나 화를 낸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워요. 책 읽는 사람들은 소수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회문제에도 밝고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이라고 믿는데, 작은 것만 달라져도 화를 내는 모습을 맞닥뜨릴 때 말이에요. 읽는 사람에게 제동을 건다는 오래된 방식이 오히려 드물어진 걸까요. 요즘은 모든 콘텐츠가 소비자 중심이기에 ‘니즈’를 충족해야 한다는 기대가 있어서인지.

그런 면에서 작가님이 성취한 바를 실감해요. 작가님의 책들은 적어도 시각적인 면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보여요.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스페이스 (논)픽션』 같은 책들 보면요.
둘 다 디자인이 좋죠. 예전에 제가 출판사에서 일할 때 들은 충격적인 말 하나가 그거였어요. 제가 디자인을 이렇게이렇게 해보는 거 어떨까 제안하니까 선배 마케터가 “지돈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한국 독자들은 세련된 거 싫어해. 우리가 세련된 거 못해서 안 하는 줄 알아?” 묻더라고요. 세련됐다라는 판단에도 층위가 다양하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세련됨’에는 재수 없다는 인식도 붙어요. 수더분하고 소탈한 것의 반대랄까.

수더분보다는 건조한 걸 못 참는 것일 수도 있어요.
건조한 것도 못 참죠. 세련된 게 대체로 건조한 거랑 같이 가잖아요.

저나 제 친구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브랜드에서 만약 그런 컴플레인(배려 없는 디자인이다, 읽기 불편하다 등의)을 받았다고 하면요, 그건 좋은 시그널이에요. 우리의 작고 소중한 우물을 넘어섰다는 뜻이니까요. 나 혹은 내가 만든 책으로써 전혀 호감을 주지 못할 사람과 마주쳤다는 건, 지금 우리의 세계가 넓어졌다는 뜻이니까요.
계속 넓어져야 될 텐데요. 쪽프레스에서 나온 책의 고정 독자가 한국에 1만 명 단위만 돼도!

뭘 하든 1000명만 돼도요!
안드레스 솔라노 작가의 책도 좋던데요. 디자인도 좋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맞아요. “살라리오 미니모(최저 임금)”이라는 제목에 어울릴 만큼 가볍고 홀가분하게 작업했거든요. 몇 배수 시안 같은 불필요한 절차도 없었고.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니

소설가가 아니라면 어떤 길을 걷고 싶으세요?
소설가 외에는 없습니다. 병행할 수 있는 거라면, 최근에 친구랑 얘기하면서 돈이 많아지면 뭐 하고 싶냐는 얘기를 잠깐 나눴는데 갑자기 떠오른 게 목욕탕이었어요. 언젠가 도쿄에 갔을 때 그냥 동네 목욕탕 같은 델 들어간 적 있거든요. 깨끗하고 잘 정리된 예쁜 타일이 있는 동네 목욕탕을 운영해보는 것도 상상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소설가라는 직업에 만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립적인 작업을 하고 시간을 비롯한 생활의 모든 것을 간섭받지 않고 제가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영화 <타르>(2022)에서 타르(케이트 블란쳇)가 시간을 통제하는 위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기억나는데요.
타르는 남을 통제하지만, 저는 저만 통제하죠! 출퇴근 안 해도 되는 것만도 너무 좋아요.

일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9 to 6가 싫은 거죠?
9 to 6가 싫어요. 정해놓은 시간을 정해놓은 공간에서 일해야 된다는 게 안 맞거든요. 학교 다닐 때도 버거웠고.

그것만 아니면 일은 하실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정작 해내는 일의 양이 적지 않죠. 혼자 작업하는 것의 외로움은요?
이런 말 하면 웃긴데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외동으로 자랐거든요. 혼자 있는 게 당연해서 혼자서도 할 것이 많고 외롭다는 감각을 못 느끼겠어요.

독립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통제해나간다는 건, 울타리가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런 의미의 결핍은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그건 그런 거죠. 두려움. 혼자서 해야 되고 보장해주는 뭔가가 없다는 두려움. 그것은 예전에도 겪었고 지금도 때때로 마주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동료 작가의 존재예요. 외로움이든 두려움이든 뭐든 극복하게 돼요. 이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같이하지 않더라도 나와 소통이 되고 내 작업을 지지해주는 동료가 존재하면요. 다 같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도 자주 동료를 강조하곤 했어요.

근데 그게 가장 그들이 채우기 힘든 요소잖아요.
학교 다닐 때 잘 만나야죠. 학교 다닐 때 딱 보고 쟤는 진짜다 이렇게요. 더불어 그렇게 같이 잘 지내려면 자기도 찐이어야죠. 특별한 게 아니라 자기 작업 열심히 하고 진짜로 좋아하면 되는 거니까요. 저는 운이 좋기도 했지만, 이렇게 생각해요. 본인이 성실하게 자기 작업을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동료는 나타나게 돼 있다고. 믿고 그냥 하면 된다고. 그러니까 친구를 찾아야 된다면서 네트워킹을 한다고 어디를 가고 그럴 필요 없어요.

인터뷰이 | 정지돈 jidon jung
인터뷰어 | 김미래 mirae kim
편집 | 쪽프레스 press jjokk
기획 | 윤지혜 jihye yoon
사진 | 박유진 eugene park
디자인 | 신채린 chaerin shin 공간 | 스파인서울 spineseoul


2023.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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